마음에 상처를 주는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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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상처를 주는 가족
작년, 긴 추석 연휴를 앞둔 일주일 전쯤이었습니다.
“선생님 이번 추석엔 아버지가 외출을 못 하게 해 주세요.”
“명절에는 웬만하면 환자들에게 외출이나 외박을 허락해주는 편인데요.”
“제가 상견례를 하는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안 오셨으면 해서요.”
미영씨의 아버지인 A씨는 만성알코올중독 환자입니다.
정신과 입원이 벌써 3번째이고, 음주운전과 술 문제로 직장에서도 잘렸지요.
더 큰 문제는 2년 전, 딸의 상견례 자리에 만취 상태로 나타나 예비사돈과 사위에게 폭언을 했고 결국 결혼이 파투났다는 점입니다.
'다 지나간 일이다. 하나밖에 없는 딸 상견례에 못 간다는 게 말이 되냐, 아버지 취급도 못 하겠다는 거냐.'
언성이 높아지고 모진 말이 오간 다음, 미영씨는 결국 눈물을 보이면서 나가 버립니다.
A씨는 헛웃음만 지으며 연신 담배만 찾습니다.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이럴 때 딱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저 같아도 아버지가 너무 밉고 싫을 텐데.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을 텐데.
때로는 시간이 지나도 너무 생생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후벼 파는 듯 아픈 상처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정도로 나를 힘들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보통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남이라면 욕하고 안 보면 그만인데, 친구나 연인이면 헤어지면 그만인데.
도저히 떼어낼 수도 없고 끊을 수도 없는, 가족이라 더 원망스럽고 아픕니다.
제가 수능을 치기 3일 전 부모님이 물건을 집어던지며 싸웠던 일, 아버지의 빚보증, 어머니가 어린 제게 했었던 모진 말들.
정신과 의사가 된 지금도 아직 다 잊지 못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눈물을 흘리고 사과하고, 기도했지만 미처 다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미영씨가 언젠가 아버지를 용서할지, 계속 미워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A씨의 간 상태가 악화되어 간경화 진단을 받았을 때, 미영씨는 저한테 매일 병원으로 찾아와 간 수치를 묻고, 수술이 가능하냐며 울었습니다.
제가 귀찮을 정도로요.
상견례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결혼식에도 아버지를 안 부를 건지.
미영씨는 계속해서 A씨를 미워할 마음의 준비가 된 것일까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수백 번 미워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잘 안되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아 또 먼저 연락해서 상처를 받고.
부모를 미워한다는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을 미워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모질지 못하고 또 상처 받는 것이겠지요.
스스로 아프면서도 끝내 손을 놓기 무섭고 어려운 것이겠지요.
만약, 우리가 부모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를 고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돈 많은 아버지 금수저, 다정하고 능력 있고 나를 한없이 사랑해주는 사람을 택하겠지요.
참 많은 생각과 고민을 뒤로한 채 A씨에게 물었습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무얼 하고 싶냐고...
“술 안 마시고 싶지...... 가족이랑 같이 살고 싶고...”
긴 추석 연휴가 끝나고 A씨가 퇴원하던 날, 미영씨는 다시 병원을 찾았습니다.
10월 말로 상견례를 미뤘는데 잘한 건지 모르겠다고 물었습니다.
저 역시 자신이 없었으나 덤덤히 잘했노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얼마나 불안했을지, 며칠 밤을 한숨도 못 자고 고민했을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요.
A씨가 정말 술을 끊을 수 있을지, 미영씨가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는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너무나 아팠었던 그들 가족의 마음에 잠깐의 위안이라도 되었기를.
작은 행운이라도 함께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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