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임세원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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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임세원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
저는 작년 12월의 마지막 날,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0여 년간 환자들을 위해 헌신해온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문자였지요.
저는 선생님과 그리 자주 뵙진 못했습니다.
삼성전자에서 일했던 기간이 짧았기에 항상 바쁘셨던 선생님과 몇 마디 나눠보지도 못했지요.
하지만 선생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전해 들었을 때 저는 부끄러움과 황망함, 가족을 잃은 듯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조현병이란 말을 검색하면 아주 많은 기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조현병 환자와 상담하는 게 무섭지 않냐고, 위험하지 않냐고.
무섭고 겁이 납니다.
어떤 분들은 공격적인 환자와는 가급적 상담하지 않으려 하기도 합니다.
저도 폭력성향이 높은 사람의 치료를 대학병원이나 큰 병원의 다른 의사에게 미루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무서웠으니까요.
선생님은 한 번도 그런 환자들을 돌려보내지 않으셨더군요.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아프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생각하셨었군요.
정신과 의사경력만 20년이 넘는 선생님께서 그 환자의 위험성과 공격성, 충동성을 예상치 못하셨을 리 없습니다.
충분히 감지하고 다른 만성병원이나 기관으로 보내실 수도 있으셨을 겁니다.
대학병원 교수이신 선생님께선 정치인, 재벌, 사업가, 연예인 등 VIP들을 우선으로 상담하고 치료하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선생님께서는 모든 환자들을 똑같이 대하셨지요.
아랫사람에게 미룰만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셨더군요.
사람의 인성과 진정한 가치는 위기상황에서 드러난다는 것.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눈앞에 상대가 칼을 휘두르는 상황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타인을 위한다는 것.
1만명 중 1명이나 할 수 있을까요.
현실은 영화와 다르고 우리는 아이언맨도 마동석도 아닙니다.
99.9%의 사람은 비명을 지르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을 겁니다.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기나 할까요.
선생님은 그러지 않으셨더군요.
동료들과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생명의 갈림길에서 굳이 돌아오셨더군요.
저는 그러지 못했을 겁니다.
돌아보기 전에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렸을 것이고 다른 무엇보다 내 몸이 소중하다는 결론을 내렸을 겁니다.
그 짧은 찰나, 선생님은 남편이자 아버지이기보다 의사이길 택하셨나 봅니다.
가족보다 다른 환자들과 동료직원을 우선순위에 두셨나 봅니다.
‘도대체 왜 이분이 다른 의사들도 많은데 하필 내게 오셨는지 원망스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일이다.'라고 스스로 되뇌면서 그분들과 힘겨운 치유의 여정을 함께 한다.’
선생님. 시간은 9개월이나 흘렀고 선생님의 말씀만이 우리 곁에 남았습니다.
숭고한 희생 뒤에 저희는 조금 더 안전한 환경에서 진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동료와 후배, 무엇보다 환자의 안전을 위한 방법을 생각하고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가족분들이 언론에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이 일로 인해 조현병 환자가 모두 위험하다는 잘못된 인식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것이었지요.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분노와 원망 대신 용서로 치환하신 성숙함과 품격은 모든 조현병 환자와 환자의 가족들을 비난과 손가락질로부터 감싸주었습니다.
결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으셨음에도 수천 명이 조문했던 장례식의 조의금을 전부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신 마지막 모습까지.
자신보다 끝까지 타인을 걱정하시던, 어찌 그리 선생님과 꼭 닮은 모습이셨을까요.
선생님. 저희는 조금 더 살아가겠습니다.
당신의 말씀과 의지를 가슴에 간직하고, 항상 환자들보다 더 낮은 곳에서, 인내하기 힘든 슬픔과 고통에 무너지는 날엔 간간이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겠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절망이 아닌 따듯함과 숭고한 뜻을 남겨주신 선생님과 유족분들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존경과 감사를 보냅니다.
앞으로 저와 모든 후배 의사들이 묵묵히 걸어갈 길이 부디 선생님과 조금이라도 닿아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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