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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상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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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연세봄정신과
댓글 0건 조회 1,707회 작성일 20-11-04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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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상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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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픽사베이 



제일 좋은 상태를 나타낼 때, 우리는 과실과 곡식을 보면서 ‘잘 익었다’라고 한다. 사람에게는 ‘성숙’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렇다면 사람의 경우, 성숙을 판단하는 기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인격적인 성숙이나, 경제적 자립성의 정도, 주변인의 평가나 인품 혹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측면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존재할 것이다.

심리학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의 성숙을 판단하는 기준은 꽤 다양하다. 자아가 본능을 다스리는 정도라든가, 초자아의 타협을 배우는 법, 정체성의 확립에 근거를 두기도 한다. 정신분석학의 눈으로 성숙을 판단할 때는 프로이트의 발달이론과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이론을 자주 인용한다. 나이에 따른 발달단계를 나누고, 그 나이에 걸맞은 과업을 정해놓은 뒤 그것을 완수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성숙도를 나누는 것이다.

아동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에릭슨은 인생을 총 8단계로 나누었고 모든 사람은 유전적 기질을 바탕으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며 한 단계씩 성장해 나간다고 보았다.
그와 달리 프로이트는 초기 아동기 때 부모와의 애착과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즉 인간의 성숙도는 아동기 이전에 거의 결정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반면 에릭슨은 사회적 대인관계와 경험, 부모나 가족 이외에 친구 등, 다양한 타인이 주는 요인들도 자아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즉 아동기 이후에도 인간의 성숙도는 변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 명의 사람으로서 나는, 인생의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변화할 수 있다는 에릭슨의 이론에 더 공감한다. 비록 불행하고 결핍된 아동기를 보냈어도 인생의 중반기를 거치며 변화할 수 있다는 여지와 가능성, 그 유연함이 조금 더 인간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각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서이다.

아픔과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의 삶과 과거를 들여다보기로 한 이유는 환자들과 상담을 하면서 느낀 한계점과 깨달음 때문이다. 무의식의 깊은 곳에 묻어둔 상처를 끄집어내는 괴로운 작업을 지켜보면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때로는 함께 울었다. 그 과정에서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상처 받은 어린아이임을 깨달았다.

물론 나의 상처를 완전히 치료해야 치료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나 역시 과거의 아픔과 직면할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객관적인 치료자의 눈으로 인생을 돌아보기로 한 것이다. 심연에서 내 트라우마를 어렵게 끄집어내고, 그것을 어린 시절의 내가 아닌 정신과 의사인 내가 거리를 두고 조망한 뒤, 아프지 않고 다듬어 다시 내면에 함입하고 수용하는 과정. 타인의 삶을 어루만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나 자신의 상처들에 소홀하고 무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와 당신과 우리 모두는 에릭슨의 8단계 심리사회적 발달 이론을 통해 상처를 들여다보고 숙고하는 계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단계 신뢰와 불신의 단계(trust vs mistrust)

0세~1세까지의 기간이다. 이 나이 때 아이는 엄마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다. 아기는 본인이 원하는 것을 일관되게 얻고자 하며 무엇보다 자신의 안전이 보장되어야만 안심할 수 있다. 즉 이 시기에 부모가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어야 향후 어른이 되었을 때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엄마조차 믿지 못했던 이들이 다른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만약 이 시기에 엄마가 너무 바쁘거나 병으로 인해 곁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을 경우, 혹은 이혼이나 부부간의 갈등으로 엄마의 부재를 경험한다면 그 사람은 원초적인 생존에 있어 항상 무의식적 불안에 시달리는 어른이 될 수 있다.




2단계 자율성과 수치심, 의심의 단계(autonomy vs shame & doubt)

만 1~2세에 해당되는 이 시기는 막 걷기 시작하며 세상을 돌아다니고 경험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이전과는 달리 본인의 두 팔과 다리로 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데, 어떤 부모는 과도한 걱정과 불안으로 지나친 통제를 하려고 한다. 아이가 멀리 나가려 하거나 새로운 물건을 만지는 것, 움직이는 것 등을 너무 과하게 혼내거나 겁을 주면 아이의 마음엔 수치심과 의심의 싹이 자란다.

엄정한 눈으로 바라보면, 우리나라의 우리의 엄마들이 이런 실수를 많이 한다. 자신의 아이가 너무나도 소중하기에 온실 속에 가둬놓고 키우는 것이다. 우리 아이가 티끌만큼도 다치지 않게, 소중히 키우려는 노력이 오히려 아이의 성숙을 방해하는 모순이다.

아이는 본인의 자율성이 과도하게 침해받으면 ‘엄마가 나를 믿지 못하는구나’, ‘나는 부족하구나, 뭔가 문제가 있어’라고 생각해버리게 된다. 즉, 본인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3단계 주도성과 죄의식의 단계(initiative vs guilt)

만 3~5세경, 우리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간다. 인간이 처음으로 부모의 품을 벗어나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시기다. 이때 우리의 세계는 확장된다. 처음으로 사회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인정과 공감을 얻을 수도 있지만 타인과의 관계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겪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부모의 역할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슬프지만 현시대의 부모는 이 시기에 아이들을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선행학습에 투자한다. 이 시기는 외국어보다는 한국어 발달에 집중해야 한다. 다른 아이보다 똑똑하게 키우겠다는 욕심에 아이에게 첫걸음부터 과도한 부담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4단계 근면성과 열등감 (industry vs inferiority)

초등학교 시절이 이 단계에 해당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타인과의 경쟁이 시작된다. 잘하는 아이는 상을 타고 1등을 하고 선생님과 부모의 칭찬을 받겠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는 혼나고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가 나와 성취감을 느끼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는 경우 남들과 비교당하고,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믿지 못하게 된다.

이때 부모의 역할은 공부하라고 다그치거나 학원을 여러 개 보내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잘못된 열등감을 가지지 않도록 용기를 줘야 한다. 단순히 외우고 맞추는 게 아닌 다른 분야에 재능이 있는지 함께 고민해주고, 아이가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도록 반복적으로 응원해줘야 한다. 초등학생은 부모의 한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용기를 주는 한마디,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긍정적이고 너그러운 태도에 엄청난 용기와 열정을 갖고 변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갖춘 시기라는 것을 잊지 말자.




5단계 정체성과 혼돈(identity vs role confusion)

바로 이 단계가 청소년기, 흔히들 말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소속감과 탐색이다. 소속감이란 어느 집단에 속하여 인정을 받고, 연대감을 형성하고, 탐색이란 새로운 세계와 가능성을 찾아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려고 하는 시도다.

안타깝게도 부모들은 청소년기 자녀들에게 소속감을 심어주는 데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탐색 능력을 길러주는 데는 소홀하다. 오히려 ‘너는 공부를 잘하니까 의사가 되어야 해, 변호사가 되어야 해’라는 식으로 자신의 기준에 맞춰 삶을 정하고 강요함으로써 아이의 탐색 능력을 말살해버린다. 부모가 정한 프레임과 틀 안에 자녀를 가두고 정체성의 성장을 조기에 마감시켜버리는 것이다.




6단계 친밀감 대 고립감 (intimacy vsisolation)

20~40세에 해당하는 초기 성인기에 우리는 이때 진로를 탐색하고 직업을 정하며 이성을 사귀고 결혼을 하거나 가정을 꾸리기도 한다. 비혼을 지향하는 경우, 다른 가까운 지인과의 연대감을 형성하는 시기다. 인생에서 가장 건설적이며 에너지 레벨이 높은 시기이기도 하다.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 무수히 많은 관계를 형성하고, 그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원하는 만큼의 연대감과 성취와 안정된 관계를 이루지 못할 경우, 사회적 고립감과 심각한 외로움, 우울감까지도 생길 수 있는 시기다.

이 시기에 방황하고 불안해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이’들이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데, 이제는 내가 누군가를 책임져야 한단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하라고 한다. 지금의 내가 이 끝에 서 있다.




7단계 생산성과 침체성 (generativity vs stagnation)

40~50대 후반까지의 시기가 여기에 해당된다. 중년기로 불리며 인생의 후반부를 향해 달려간다. 내가 무엇을 이뤘고 어떤 의미와 보람을 느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평가한다. 그게 만족스럽지 못했다면 좌절하고 침체에 빠지는 시기다.

30대까지는 원하는 것을 충분히 이루지 못했다고 해도 아직 젊으니 기회가 있기에 다시 도전한다. 성숙을 이루거나 안정되어 있지 않아도 벼랑 끝에 있지 않다. 하지만 중년은 다르다. 남들은 벌써 이만큼 이뤘는데, 부도 쌓고 자식들도 이만큼 키웠는데, 누구 아들은 외고를 가서 서울대에 붙었다는데, 그렇게 평가의 기준을 밖에 두고 비교해가며 초조해진다.

본인이 청소년 시절에 부모로부터 상처 받았으면서도 그토록 미워했던 부모와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했던 실수를 자기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것이다. 뻔히 아는 실수를 반복하는 이유는 집착과 불안 때문이다. 중년이 되면 가벼워져야 한다. 자식을 소유하려 들어선 안 되며 배우자, 일, 경제력, 성공에 대한 집착도 내려놓아야만 한다. 그래야 건강한 노년으로 넘어갈 수 있다.




8단계, 자아통합 대 절망 (ego integrity vs despair)

마지막 노년기의 시기다. 인생을 돌아보면서 자아가 얼마나 성숙한 상태인지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놓인 모두가 깨달음과 지혜를 얻는 것은 아니다. 70~8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미성숙한 이들이 많고 그들은 본인이 지나쳐온 이전 단계에 집착하고 미련을 가지며 거기에 머무른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본인이 청년기에 있다고 착각하며 해서는 안 될 말이나 행동을 하고, 심지어 아이처럼 유치하거나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의 성숙도는 아동기 이전에 결정된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자면 이미 내 미래는 행복한 것으로 결론이 났겠으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초기 아동기 시절의 나는, 중산층의 외동아들로 부족한 없는 관심과 지원 속에서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불행하게도 어머니가 유방암에 걸린 후 나의 애착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입원, 재발, 항암치료를 거치며 어머니는 원래의 여유로움을 잃어버렸고 한쪽 가슴을 잃었다는 상실감, 여자로서의 삶이 끝나버릴지도 모르며 남편이 나를 예전처럼 사랑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괴로워했다. 그렇게 깎여나간 자존감을 자기 자신이 아닌 어머니로서의 만족감으로 보상받으려 했고, 과도한 경쟁심과 열등감을 어린 아들에게 투사하기 시작했다.

아들을 최고로 키웠다는 훈장에 집착한 어머니는 혹독한 교육을 강요했다. 덕분에 나는 과외와 학원을 세 군데씩 다녔고, 기를 쓰고 노력해 전교 10등을 해도 매번 혼났다. 이웃집에 언제나 전교 1등을 하던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넌 걔한테 맨날 지고서도 잠이 오니? 엄마는 동네 부끄러워서 다닐 수가 없어.”
“걔는 네 친구가 아니야, 라이벌이고 적이야, 반드시 이겨서 복수해야 해.”

복수라니, 열네 살 중학생이 대체 누구에게 복수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인가. 그때 엄마가 했던 말은 과연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교 1등 친구와 비교당했고, 엄마는 자신의 열등감과 우울감을 거칠게 토해냈다. 가장 친한 친구였던 그는 어느새 나에게 가장 미운 존재가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나는 중학교 시절, 친구도 소속감도 탐색 능력도 모두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청소년기에 접어들어 부모와 큰 갈등을 겪은 나는 이 시기에 무수히 방황했다. 화해의 노력도 해보았고 부모를 이해하려고도 했으나 갈등은 더 악화되었고, 부끄럽지만 의절할 만큼 사이가 벌어졌다. 가족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외로움 속에서 혼자가 아니고자 다른 것에 의존하고 집착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술이었고, 주식이나 쇼핑에 중독되었으며 어떨 땐 일에 중독되어 인정 욕구와 자존감을 보상받으려 했다.


우리의 삶은 변수와 갈등, 예상치 못한 실패로 가득하며 누구나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는 좌절과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완벽한 인생을 사는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완전한 성숙이란 요원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에릭슨의 이론을 공부하고 활용하고 내 삶에 들여놓는 과정 속에서 내가 새로이 느낀 점은, 우리가 끝없이 상처 받고 부모로부터 경험한 상처를 반복하고 되풀이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언제나 회복과 재생의 유연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1단계 혹은 4단계의 어느 순간에 좌절하고 트라우마가 생겨 인생에 구멍이 뚫렸다 하더라도, 인생의 다른 순간에서 상처 받은 자아를 회복할 성숙의 기회는 반드시 존재한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라고 해서 꼭 부모에게 직접 사과받을 필요는 없다. 배우자나 친구에게, 혹은 자신의 아들, 딸로부터 애착의 구멍을 메우게 하고 영혼의 구원을 받는 순간도 존재한다. 더 나아가 가장 좋은 것은 자기 자신의 손으로 그 구멍을 직접 메우는 경험이다.

당신의 상처는 영원하지 않다. 당신이 완벽하지 않듯 그 상처 또한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영원하지 않고 당신을 둘러싼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그러니 자연스럽게도, 당신의 상처는 영원할 수 없다.
인생의 회전목마, 그 어딘가에서 당신의 트라우마는 반드시 회복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꼭 아니더라도 회복될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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